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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조선시대의 교육(시대적 배경/교육 제도/ 학규)

by 한가득 202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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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 배경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고 교육을 통해 내면화 시키고자 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통해 성리학적 이념을 구비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다. 중기에 이르러 사림파의 등장으로 여러 뛰어난 교육자를 배출하여 수준 높은 학문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파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여러 란을 겪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임란이후 신지식인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이 대두 되었으나 집권층에게 수용되지 못하였다. 그 후 실학은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근대화를 위한 사상적 틀이 되었다.

2.조선시대의 교육제도
1) 관학
(1) 성균관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목적은 두 가지로 대별 된다. 하나는 통치이념인 유학의 보급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체제에 필요한 고급관리 양성이다. 성균관의 시설은 크게 교수활동시설, 문묘제향시설, 학사업무시설, 공급 및 기타 시설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시설과 구조는 전통적인 학교, 특히 관학의 모습을 이해 할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며, 향교 등은 그 축소판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교관의 자격은 별도의 규정은 없지만 학식과 개인적인 인품이 중요시 되었던 것 같다. 업무는 유생의 교수, 생활지도, 과서시험의 감독, 성균관의 행정 담당이었다. 입학자격은 상재생인 입학시험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를 원칙으로 하고 부족 시 문음 승보생(하재생), 향시나 한성시에 합격한 사람, 학문에 뜻이 있는 관리들이 선발 되었다. 수업연안은 4년 반이 원칙이나 실제로 8년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균관의 교육과정은 유학만을 참된 학문으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상을 이단시 했던 풍토 속에서 유교경전 외에는 일체 읽지 못하게 하였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엄격한 생활 규제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유생에게 자치활동의 자유를 주어 대표를 선출해 필요한 사항을 결정했다. 성균관의 경비는 막대하여 국가에서는 학전, 노비, 어장 등을 지급하여 그 세수로 재원을 삼도록 했다.
(2) 사학(四學)
사학은 성균관의 예비학교이며 모든 부분은 성균관이 총괄하여 하급교육기관으로 부속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사족의 자제들이 주로 입학하였으며, 성균관입학과 생원, 진사합격이 실질적인 교육 목표였다.
(3) 향교
향교의 생도들은 대부분 소과에 응시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성균관이 고등 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중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교육과정은 강독 제술 및 습자를 중심으로 한 여러 교과목이 있었다. 향교의 유생은 하한 17세 상한 40세 까지 입학 할 수 있었다. 정원은 지역 단위의 크기에 따라 90명, 70명, 50명, 30명을 정원으로 했다. 교관은 교수관과 훈수관이 있는데 교수관은 6품 이상 훈수관은 7품 이상이었다. 하지만 전국에 파견할 만큼 교관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사나 생원인 교도나 지방 학사인 학장 같은 교관을 두기도 했다. 예조는 향교교육을 각 도의 관찰사를 통하여 행정적으로 지휘하고 감독하였다. 향교는 유교이념에 따라 민풍을 순화시키고 사회문화의 심층에 이르기까지 유교이념을 심화하고자 했다. 재정은 국가지급 학전과 지방재정으로 충당했다.
(4) 서원
16세기 중반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서원이 이를 대신하여 지방의 문화와 교육을 진흥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서원교육의 핵심은 국가의 유용한 선배를 양성하는데 있었으며, 과거를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서원의 교관은 총책임자인 원장과 강학과 훈도를 담당하는 강장과 훈장, 사무와 원생들의 훈육을 맡은 재장과 집강이 있다. 서원은 관학이 과거준비에 편중되었던데 비해 학문 그 자체의 탐구와 연마를 위한 활동을 강조하였다. 특징으로는 학문과 수양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 관학에 비해 자유로운 학문과 수양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 모든 선현에게 제향했던 관학과는 달리 소수의 선현에 대해 제향하였다. 하지만 17세기 말에 이르러 강학의 기능을 상실하고 당쟁의 본거지지자 군역을 피하는 거점으로, 심지어는 민중위에 군림하여 착취하고 횡포를 부리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서원을 줄이려고 노력해도 줄어들지 않다가 대원군에 의해 47개를 제외하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다.
(5) 서당
서당의 성경이나 학교제도의 단계에서 보면, 사설 초등교육기관이라고 하겠으며 기능면에서도 동리의 교화의 중심기관이기도 했다. 그 종류로는 훈장이 직접 서당을 열어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자영서당, 유지가 자신의 자제나 문중의 자제를 가르치는 유지독영서당, 유지들이 자신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유지조합서당, 한 동리가 조합을 만들어 공동의 경비로 서당을 운영하는 동리 공동서당, 종친끼리 조합을 구성하여 자신들의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동족조합서당, 관립서당이 있다. 5-15세 정도 까지 취학하였으며 일반적으로 16세 이후에는 향교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신분상의 제한으로 20세가 넘도록 면학하기도 했다. 교육과정은 크게 강독과 제술 및 습자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훈장은 교과지도 뿐 아니라 생활지도도 하였으며 농번기에는 수업을 하지 않았다. 서당은 지방 동리의 유일한 교육 기관이자 국민대중의 문자교육과 민풍, 도덕규범 등을 확립하는 교화의 기능도 갖춘 교육기관이었다.
3. 학규
조선시대는 교육운영에 관한 규정 면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규정하고 운영하였다. 기본적인 사항은 법전에서 정하고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절목 혹은 사목으로 정하였다. 학령을 위시한 대표적인 학규들은 경국대전, 권학사목, 학령, 경외학교절목, 학교사목, 학교모범, 원점절목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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