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의 교육 가능성
1) 교육의 필요성
인간의 교육 가능성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교육이 필요한가?”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인간이 교육 가능한 존재로서 그리고 교육을 필요로 하는 본질로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필연성은 이미 알고 있던 인간의 본질에 부수적으로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 존재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이미 바로크시대의 코메니우스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인간을 “교육받을 수 있는 동물”, “훈련 가능한 동물”로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교육이 없이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뿐 아니라 칸트도 이 생각에 동조하였는데, “인간은 교육받아야만 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라는 문장으로 그의 교육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이래를 위하여 인간학적인 깊은 사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문제로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랑에펠트는 인간을 ‘교육 필연적인 동물’로써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을 교육 받을 수 있는 동시에 교육을 필요로 하는 본질로서 이해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상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 그 자체이다. 우리는 경험적 사실에 의해 확실히 존재하는 교육이라는 인간 이해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지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할 수 있고, 교육 필연적인 동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의미를 결핍의 표현으로서 이해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무력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고, 이러한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 우리는 항상 인간학적인 관찰처럼 문제 설정을 바꾸어 보고 질문을 하여야 한다. : 인간교육의 필요성에서 어떤 특별한 우월성을 표현할 수 있는가?
2)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플래스너와 그 이후의 매우 인상 깊게 주장된 명제이다. 그리고 이 명제는 게엘렌이 인간은 이미 선천적으로 문화의 본질에 매우 밀접하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매우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론적인 전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결핍된 존재’ 임을 의미한다. 인간은 생물학 적인 구비에 있어서(자연적인 무기의 부족과 보호하는 모피의 결핍) 동물에 비교하여 터무니없이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오로지 인위적으로 창출된 환경과 문명(문화) 속에서만 일반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 - 생존하여야 하고, 반쪽의 존재이자 벌거숭이인 인간에게는 인위성이 인간의 본성에 일치하는 표현이다.
인간은 먼저 생물학적으로 보아서 결핍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결핍된 존재로 태어난 후에 결핍의 보상으로서 하나의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생물학적인 구조와 문화가 처음부터 서로서로 상호보완적인 통일체의 부분으로서 관찰하여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피의 결핍이 다른 측면에서는 감각기능의 증대라는 장점으로 표현된다. 감각기능의 증대는 특수한 완성됨의 표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결핍은 균형을 이루고 있고 이 균형에는 바로 교육의 필연성을 통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견해는 중요하다.
니체는 이런 완성의 가능성에 의미 속에서 ‘정해지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발달시켜 나가는 동물’을 언급하였다. 이러한 연관 속에서 우리는 포르트만의 생리적 조산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1년 가량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생리적 조산) 미숙한 성장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환경이나 사회에 적응(교육) 하기 쉽다. 즉 인간은 일정한 시간 동안 각기의 다양하게 주위 환경과 영향에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환경의 보호와 영향을 통하여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 형성이 된다. 이에 비례하여 다른 동물들은 아직 자궁 속에서 보호된다.
결론을 내리자면, 인간 역사의 본성은 다시금 하나의 커다란 전체 속에서 상호적으로 연관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교육 가능성과 교육의 필연성은 이미 인간의 육체적인 구조 속에서 다양하고 깊은 관계성을 지닌다.
3) 노년기의 교육
인간이 기본적으로 교육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교육의 연령을 어린이에게 한정시켜서는 안 되고, 성인(성장-발육)이 되는 순간에 끝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인간이 항상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머문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단계에서 새로운 삶의 과제가 주어지고, 새로운 단계로 자신을 발달시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전체 삶 동안에 계속적으로 교육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평생교육은 지식과 기술의 매개의 역할의 의미에서 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인간을 형성에 가는 지속되고 순수한 의미와 치료적인 의미에서 보호와, 불미스러운 훼손의 제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모든 상담은 위기적인 상태에서 이미 하나의 교육적인 행위이다. 심지어 심리치료 역시도 현 존재에 적합한 성취로 향한 진정한 교육이다.
따라서 교육은 연장자와 연소자간의 관계에 더 이상 제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년배 간의 교육도 중요하다. 청년 운동 시대에 젊은이가 젊은 사람을 교육하는 것이 성공을 거둔 것처럼, 성인이 성인을 교육하는 것과 같은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젊은이를 통하여 노년의 참된 의미 있는 교육이 존재하기도 한다. 프뢰벨이 경직되고 고정화된 성인들이 어린이 자체 자연 그대로의 삶과 무의식적인 교제 속에서 다시 젊어진다고 말한 것처럼 교육은 의미 속에서만이 아니고 당연히 하나의 의식적인 교육의 의미 속에서 역시 강조된다.
이런 이해는 특히 노년에 대한 관계 속에서 유효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년은 능력의 쇠약과 인간들이 절망적으로 그 운명의 지배 아래서 놓여 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년은 청년 시절 못지않게 그 자신의 고유한 법칙과 스스로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새로운 발달단계들을 고유한 자기 본질 속에서 찾으면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의 노인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은퇴 후 의미를 상실해 버린 현존재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활용하기 위해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
특히 오늘날은 노년층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노인 교육의 과제는 현재 상황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고령자들이 가족이나 양로원에서 보호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것은 의학적이고 사회적인 과제이기 앞서서 교육의 과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러한 교육적 과제가 부분적으로 관찰 되었지만 최근에는 지속 가능성의 과제로서 더욱더 주의 깊은 관점에서 부각될 것이다.
4) 기능적인 교육
기능적 교육으로써 인간학적인 관점은 앞서 이야기 했던 교육보다는 훨씬 더 광범위한 연구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기능적 교육은 성장하고 있는 인간이 환경에 의하여 무의식적으로 원하지 않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교육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교육의 작용과는 구별되게 그러한 형성을 무의식적으로 구성하는 힘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욱더 일반적으로 이미 “삶은 도야한다”라는 페스탈로치의 언어의 표현을 회상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미 코메니우스가 이와 유사하게 노년기까지 끌어들인 전 인생을 하나의 학교로서 파악하려 의도했었다.
그러나 이런 이론과 반대로 슈프랑어는 “삶은 도야한다”라는 정의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였다. 도야의 영향은 좋은 환경 속에서는 좋은 영향을 받지만 나쁜 환경 속에서는 나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를 일으키는 환경도 이러한 방향에서 교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능적 교육’의 영향에 대한 견해는 교육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간단하게 통제할 수 없는 힘의 가능성에 대한 지속성의 영향을 인식해야만 한다. 유해한 영향과 가치있는 영향을 구분별 해 내고 의미 있는 영향들은 옳은 방법 속에서 그 의미를 지향하기 위하여 구별하고, 시도하여야 한다.
기본적으로 올바를 관계는 기능적인 교육과 의도적인 교육이 상호보완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의 결실은 인간학적인 관찰에 있어서 하나의 특별한 과제이다.
7. 실존주의의 극복
1) 실존주의 극복의 필요성
실존철학이 인간의 현존재로부터 보여주었던 모습은 절망적이고 어두웠다. 인간의 존재가 실조주의의 마지막 낱말을 의미했다면 교육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직 본래의 실존 중 몇 순간에 있어서만 인간은 무의미한 세계로 향한 타락으로부터 뛰쳐나올 수 있다. 인간의 지속적인 형성인 도야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학적 결론에 대한 질문에 침묵할 때 실존철학의 근본의 예리함 몇 가지가 질문을 완화시킨 바 있다. 대표적으로 만남은 지금까지의 삶의 안정성을 파괴시키는 그러한 순간적인 충격으로만 이해되지 않고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초월하는 삶의 가능성의 개시로 보았다. 다시 말해 위기를 새로운 시작(가능성)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가능성은 인간을 그의 삶속에서 수없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어려움 후에 항상 다시금 행운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경험이다. 우리는 이러한 긍정적인 삶의 경험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경험 가운데 새로운 시작인 내적인 전재 조거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실존 철학이 단순히 위협적으로 발전한 세계의 공포에 직접적인 표현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실존철학은 인간이 무의미한 세계 앞에서 마냥 간접적으로 이리저리 쫓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활동적인 반대 움직임을 취함으로 공포의 극복 속에서 최후의 절대적인 기초, 즉 실존철학의 의미에서 그 실존을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진정 자유로운 곳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런 과정은 인가의 비본질적인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결정적인 점화로 이해될 수 있는 마지막 과정이다. 그러나 인간이 연속적으로 이 상태에 고정될 수 없다. 그 실존은 오로지 정재적인 고독의 대가로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초 위에서 실존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의미 있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존철학이 더욱더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 그의 고독을 넘어서서 그 외의 주된 현실에 대한 관계를 결합할 수 있고, 그 삶에 의지와 내용을 부여하여 다른 사람들 또는 포괄적인 질서들에 대한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 하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존재하고 또한 이것이 모든 충격에도 여지없이 진행된다면 이것 없이는 하나의 이런 삶이 아예 불가능 하였을 그런 전제조건들 역시 마땅히 존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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