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1) 귀츨 나프의 내한
2) 윌리암슨의 한국 선교지원
-중국을 통하여 한국선교가 시도된 이면에는 알렉산더 윌리암슨이 주목된다.
① 중국
-1807년 모리슨이 선교를 할 때만해도 중국은 선교사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지않음 그래서 모리슨은 동 인도회사에 취직해서 중국에 남아있었음.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과 남경조약이 체결되어 상해, 영파, 복주, 하문, 광주의 다섯 항구가 열렸다.
-1844년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 황포조약체결
-1858년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와 천진조약이 체결됨, 그 결과 외국인이 중국에서 거주할 수 있 는 조계지가 설정됨, 중국은 9개국에 28개 처의 조계지를 허락함.
* 조계지는 점차 서양제국의 중국진출의 거점으로 변질되어감. 그리고 서구 열강들은 중국에 선교활동지역의 확대, 선교사의 치외법권, 선교활동의 자유보장 등 선교사의 특권을 외교적으로 강요하게 됨으로써 중국선교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지만 뒷날 반선교운동의 주원인이 되기도 함
-1876년 현재 30개 선교단체에 305명의 선교사가 중국에 파견됨.
-1889년 1,296명의 선교사에 세례교인이 37,287명에 이르게 됨.
② 윌리암슨
-1855년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와서 과로로 2년 만에 다시 귀국,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채 책임자로 다시 와서 중국, 한국 선교에 많은 공적 남김
*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와 성서공회에서는 영국 ,미국보다 훨씬 늦게 이 해에 처음으로 8명의 선교사를 파견해서 중국 선교 시작.
* 윌리암슨은 주로 성서의 출판과 반포를 통하여 활동하였고, 한국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다. 그가 한국선교를 지원한 것은 몇 가지에서 엿보인다.
㉠ 토마스목사의 한국선교는 윌리암슨의 알선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 갈 것을 결심하고, 윌리암슨에게 “여행 중 봉급을 받지 않고 성서공회의 직원자격으로 봉사하기를” 제의하면서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다량의 한문성서를 얻어 제1차 한국 방문길에 올랐다.
㉡ 만주를 통한 한국 선교에도 노력
북중국, 동 몽고에 여행하면서 성서반포, 복음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의 만주 선교에도 개척자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1867년 만주여행에서는 1년 전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한국을 방문하였으나 행방이 묘연한 토마스 목사의 생사에 관한 정보를 얻어 보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 다우스웨이트 선교사
1883년 중국내지선교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가 한국을 방문 선교하게 된 것은 바로 윌리암슨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3) 토마스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① 토마스 선교사(1840-1866) -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자
1863년 – 런던대학교의 뉴칼리지에서 학사 및 신학과정 수료, 목사안수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중국 상해에 도착
1864년 –아내 케벌라인의 사망,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 선교사와의 불화,
-런던 선교회에 사표제출, 청나라 해관에 통역으로 취직
1865년 –지푸에서 윌리암슨의 소개로 한국의 천주교인 두사람과 만남,
-한국으로 선교여행 출발 → 2개월 반 동안 천주교인들을 통하여 언어를 습득하고 성서를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침.
-서울을 향해 갔지만 태풍으로 인해 목숨만 건지고 만주를 통해 북경으로 감.
1866년 –런던선교회로부터 북경이 새 임지임을 통보받음
-북경에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교제를 나누던 중 자신이 전했던 성경이 평양까지 흘러 들어갔음을 확인. → 한국을 다시 들어가기로 결심
-프랑스 함대의 원정에 통역을 제안받고 지푸로 향함
-프랑스 함대 긴급사태의 투입으로 한국행이 무기한 연장됨
-실망하던 토마스는 한국으로 들어가는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알게 되고 편승하게 됨
-평양에서의 순교
② 제너럴셔먼호 사건
-제너럴셔먼호: 미국 프레스톤 소유로서, 중무장한 일종의 상선. 5명의 백인과 19명의 아시아인 탑승
-제너럴셔먼호는 지푸를 떠나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났고, 이어서 강의 상류인 평양으로 올라갔다. 배가 평양에 점점 가까워지자 한국 측에서는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그들의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그는 천주교인 학살을 문책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를 믿으며 그들의 목적이 야소교(耶蘇敎)를 전파하려는데 있음도 밝혔다.
이 모든 것을 밝혔고, 한국 측도 충분히 이해하였지만 제너럴셔먼호가 대포와 총으로 중무장 하였고, 통상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중군 이현익을 붙잡아 통상을 시도하려 하였고 한국 땅에 대포와 총을 마구 쏘아대자, 소극적으로 방어하던 한국군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만들었다. 평양의 백성들과 군인들은 운집하여 중군의 방면을 요청하는 한편 돌덩이를 던지며 활과 총을 쏘았다. 이틈에 퇴교 박춘권이 중군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이런 긴장 된 분위기 속에서 대동강 물이 줄어들어 제너럴셔먼호는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화공을 전개해 배를 태우고 내리는 사람을 모두 죽였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개신교의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가 거름이라도 된 듯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 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강가에서 피를 흘렸다.
③ 순교의 열매
㉠ 박춘권-중군 이현익을 구출한 인물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이 사람에게 성경책을 건네주었고 훗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신미양요-제너럴셔먼호의 소식을 안 미국은 신미양요를 일으키게 되고 이 사건이 나중에 한미수 호통상조약의 체결과 미국 각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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